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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gagotoku Maid
작전명 JKN
1.
키류와 니시키야마가 도지마조에 들어간 지 삼 개월 조금 지난 어느 이른 봄날. 가장 마지막으로 돌아온 점심 식사 순서 때문에 곯은 배를 잡고 사무실을 나온 두 사람은 전속력으로 달려 스마일버거 나카미치 거리점에 도착했다.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조직생활 적응이라는 미명에 가려진 형님들의 못난 텃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스를 수는 없어 한손에는 햄버거를 다른 한손에는 감자튀김을 한 움큼 쥐고 주린 배 안에 욱여넣기 바빴다.
"아까 우리가 들은 이야기 말이야, 그거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
유리 벽 너머의 시선을 의식해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니시키야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햄버거에서 옮겨온 마요네즈를 코끝에 묻힌 채 키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그렇지? 카자마 어르신이 관서지역 오미연합의 인물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 그거 누명이겠지?"
"정말일 리 없잖아."
단호하게 말한 후 키류는 심각한 얼굴로 들고 있던 햄버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딱 한입 남았을 뿐이지만.
"이대로 큰형님이 몰아세우면 어르신에게 큰일이 일어나겠는걸."
"큰일? 하지만 큰형님과 카자마 어르신은 긴 시간을 지내온 사이잖아. 여러 일도 함께 겪었고"
"순진하기는. 지금 두 사람 사이에 위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건 동성회에서 너 빼고 다 알 거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이건 고쿠도 세계에서도 통하는 말이라고"
키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니시키야마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현재 도지마조 내에서의 권력관계와 그중에서도 도지마, 카자마, 시마노의 대립이 얼마나 팽배한 상태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 그럼 언젠가 큰형님의 명령으로 어르신과 싸우게 될 수도 건가?"
"아마도, 음... 큰형님이 명령을 내리시면 그래야겠지?"
떠오른 만약의 상황으로 인해 입맛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먹어도 먹어도 뒤돌면 또 배고픈 두 사람인지라 차마 눈앞의 음식을 버리지는 못하고 찌푸린 얼굴로 우물거렸다.
"니시키, 우리가 할 일이 없을까?"
"우리가?"
"난 어르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절대로"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말단 중의 말단인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 그 오미연합의 인물이라는 사채업자를 찾아서 카자마 어르신과 만난 건 별일이 아니었다는 증거라도 확보해 큰형님한테 알려주자는 말이야?"
키류 너는 정말 겁이 없다니까, 하는 말을 웅얼거리며 감자튀김을 먹던 니시키야마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성회 도지마조의 유능한 조직원으로 꾸준하게 세력을 키우고 있는 카자마 신타로가 오미연합의 관련인물인 어느 사채업자와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정보는 자리를 비운 도지마 소헤이의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던 선배 조직원에게 들었다. 물론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던 키류와 니시키야마에게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자기들끼리 떠들던 내용이 들렸을 뿐이다. 그들은 키류와 니시키야마가 카자마의 소개로 조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말단인 두 사람을 완전하게 무시한 행동이었거나. 다혈질에 행동이 빠른 도지마가 증거를 가지고 카자마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카자마는 두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아직 이 세계가 어떤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한 가장 밑바닥의 지위였지만 그 소문을 알아버린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날 밤 사무실을 나온 뒤 본격적으로 계획을 짜기 위해 카페 알프스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어르신이 오미연합 쪽 사람과 큰형님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오미연합의 사채업자라는 게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어디서 만난다는 건지도 모르니 흠..."
니시키야마는 찌푸려진 이마를 툭툭 치고 있던 볼펜을 테이블 위의 종이로 옮겼지만 의미 없는 동그라미만 그릴 뿐이었다. 이 종이와 볼펜은 카페의 종업원에게 빌렸다.
"게다가 둘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아니, 동성회가 오미연합을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거니까. 우선 내용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누구와 어디서 만나는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겠군. 역시 어르신에게 물어볼까?"
"바보! 어르신이 순순히 우리에게 알려주겠냐?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하시겠지. 그런데 그 소문이 조직 내까지 퍼진 상태에서는 카자마 어르신이 설명해도 큰형님이 믿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커. 어쩌면 소문의 진위 따위는 이미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라."
니시키야마의 종이 위에 그제야 몇 줄의 글자가 새겨진다. 펜을 잡은 것도 무척 오랜만이다. 삼 개월 전 카무로쵸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방을 구할 때 계약서에 서명을 넣은 이래로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카자마조가 세워질 거라는 말이 돌고 있어. 물론 처음에는 도지마조의 하부조직이 되겠지만 카시와기 씨도 그쪽으로 갈 테고 몇 명 있잖아, 어르신을 잘 따르는 형님들이 같이 옮겨가겠지. 큰형님으로서는 작은 약점이라도 잡고 있는 게 편할 테니까 웬만한 증거로는 의심을 거두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올려다본 키류는 나름의 정리를 하는 중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거렸다.
"응."
"히라타 형님은 큰형님 눈에 들고 싶어 해."
"히라타?"
"아까 사무실에 있던- 키류! 아직도 형님들 이름을 못 외운 거야? 저번처럼 또 혼나면 어쩌려고?"
"몰라. 기억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어."
앞에 놓인 작은 잔을 들어 안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셨다가 우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니시키야마를 따라 주문한 건데 설탕도 안 들어간 블랜드 커피는 아직 키류에게는 어렵다.
"아까 사무실에서 의기양양하게 그 소문을 떠들어댄 사람이야. 히라타 형님은 큰형님의 심복을 자처하고 있어. 그런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위험한 거야. 우리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가서 들이밀어야 아무 말도 못하게 될 거야. 큰형님 눈에 들고 싶어서 없는 말이라도 지어낼 인간이니까."
"그 히라타라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때? 뭣하면 협박이라도 해서"
"히라타 형님! 이라고 불러. ... 키류, 진심이냐?"
"너랑 내가 같이 덤비면-"
"워워! 그랬다가는 도지마조의 모든 조직원들과 등지는 거야. 네가 어르신을 걱정하는 것만큼 나도 걱정되지만 우리, 우리 목숨도 좀 지키자."
너랑 내가 힘을 합치면 엄청 강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하고 니시키야마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보를 얻을 수 없잖아."
"그게 문제란 말이지. 흠... 역시 돈을 쓸 수밖에 없는 건가?"
"돈?"
검지를 까닥거려 가까이 다가오게 한 뒤 니시키야마는 겨우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챔피언 거리의 바에서 들었는데 카무로쵸에 정보를 파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원하는 금액을 지불하면 무슨 정보든 알려준대. 당장 그 정보상에게 히라타 아니, 히라타 형님이 어떤 루트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확인해보자. 우리도 같은 정보를 사는 거야."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거야?"
키류는 이제야 카무로쵸의 편의점 위치를 파악한 정도인데 니시키야마는 야쿠자도 정보를 알아야 하는 시대라며 밤마다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같이 움직이자고 늘 권하지만 키류는 그런 사교활동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삼 개월 노력한 보람이 빛을 보는 거지. 키류,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선 나한테 맡겨. 정보는 속도. 큰형님이 가족 여행에서 돌아오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내가 먼저 장소와 상대를 알아낼 때까지 너는 히라타 형님을 주시하고 있어."
"알았어. 부탁할게, 니시키."
"오우! 맡겨달라고!"
'역할 분배'라는 단어를 적어 넣은 니시키야마는 만족스럽다는 양 그 옆에 '100점' 이라는 숫자도 함께 적었다. 주어진 기간은 내일을 포함해 단 이틀. 도지마 소헤이가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 그리고 몇 명의 경호원과 온천 여행을 떠난 것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카자마의 결백을 반드시 증명해내자는 약속을 다시 한 번 나누고 두 사람은 카페 알프스를 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해바라기를 나와 도지마조에 들어가고 처음으로 짊어진 임무의 무게가 그제서야 무겁게 느껴졌다. 니시키야마와 함께 있을 때는 간단히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혼자가 되자 조금씩 불안해진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곳에는 밤의 카무로쵸를 즐기려는 낯선 얼굴의 인파들만이 가득하다. 방금 전 헤어진 친우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사람들의 시끄러운 외침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2.
다음날도 히라타는 빈 사무실의 주인 행세를 하며 몇 명의 조직원들과 소파를 차지하고 잡담을 했다. 키류가 창문의 같은 자리만 닦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누가 들어도 거짓이 뻔한 재미없는 무용담을 몇 시간이고 계속했다. 어제의 일과 관련된 정보가 나오려나 기다렸지만 카자마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지금쯤 니시키야마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을 텐데 이래서는 면목이 없다. 직접 카자마의 일을 물어볼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톡톡, 무언가 사무실 창문을 향해 날아왔다. 내다본 거리에서 니시키야마가 양손을 흔들며 나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서둘러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꽤 유용한 정보를 얻었어."
"그 카무로쵸의 정보상이라는 사람에게서?"
"응. 돈은 좀 깨졌지만 그만큼 확실해. 히라타 형님에게 직접 정보를 건넨 사람을 만났거든. 히라타 형님도 그 사람에게 정보를 산 거였어. 더 큰 돈만 내면 상관없대. 얼마든지 팔겠다고 하더군."
"직업의식 같은 게 없는 녀석들이군."
"카무로쵸에서 그런 거 찾지 마. 어쨌든 우리한테는 잘 됐지. 안에 형님들 있지?"
"응."
"여기에 서서 계속 있을 수도 없으니까. 신사로 가자."
방금 전까지 키류가 닦고 있던 이층의 사무실을 흘끔 올려다본 니시키야마가 앞장서며 키류를 불렀다. 어깨를 붙여 나란히 걸으면서 니시키야마는 낮은 목소리로 키류에게 말을 건다.
"도(島) 글자 쪽 창문만 되게 반짝이는 느낌인데. 아무튼 매주 수요일 낮에 카자마 어르신이 혼자서 카무로쵸를 나가 긴자(銀座)로 향했던 건 사실이래. 긴자의 어느 카페에서 매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있었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까지는 정보상도 모른다고 하더라. 둘이서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어서. 가끔 무슨 서류 같은 것도 주고받았다고 하더군."
"상대는 역시 오미연합의?"
"응. 정보상은 그렇다고 했어. 오미연합의 조직원은 아니고 오미연합 직계조직인 미무라조조장의 의형제인 사채업자래. 오사카 소텐보리에서 무슨 사업도 하는 사람인가 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신사의 한쪽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각자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키류의 주머니에서 나온 일회용 라이터로 차례대로 불을 붙였다. 평소라면 제대로 된 라이터를 쓰라고 니시키야마가 한소리가 했겠지만 오늘은 말이 없다.
"그 정보상이라는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사실 반신반의였거든. 그런데 정말로 아동공원에서 빨간 장미꽃을 한 송이 들고 서있었더니 갑자기 나타난 노숙자가 말을 걸었어. 꽃을 팔겠냐고. 그래서 '응, 팔게' 라고 했더니 무슨 정보가 알고 싶은 거냐고 하더라."
"... 그런 방법이었나? 고생했다."
"됐어.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장미꽃은 오다가 아는 여자애에게 줘버렸다고 니시키야마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부끄러움을 감추려 과장해서 웃었다.
"역시 정보는 돈이야. 덕분에 한동안은 컵라면으로 때워야겠어. ... 자동차 사려고 모았던 돈인데"
"여기, 보태."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이다 내민 키류의 손바닥 위에는 구겨진 천 엔짜리 지폐가 몇 장 올려져 있다.
"키류, 너 정말 카무로쵸의 물가를 모르는구나."
"... 모자라는 건가?"
"한참. 정보는 돈이야. 돈은 정보이고. 뭐, 지금은 그것만 알아둬. 마음만 받을게. 그거 네 전 재산이지?"
"..."
"신경 쓰지 마. 대신 앞으로의 계획에서 네가 더 열심히 하면 돼. 내 생각에는 쉽지 않을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카무로쵸의 유일한 신사는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있어 평일 한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서있는 곳은 불법으로 투기한 쓰레기봉투가 쌓인 장소. 까마귀 떼가 아니라면 이렇게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키류와 니시키야마, 두 사람만이 방문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니시키야마는 용의주도하게 주위를 살핀 후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어르신과 사채업자가 만난다는 긴자의 카페에 잠입하자. 이건 히라타 형님도 모르는 건데 사실 그 카페의 오너도 어느 조직과 관련된 인물이라고 하더라. 아마 보통 카페가 아닐 거야."
"오너도 동성회나 오미연합 쪽의 사람인가?"
"아니, 정보상에 의하면 신흥조직 같다고 하더라고. 동성회나 오미연합보다는 규모가 작고 더 뒷세계로 숨은. 왜 어르신은 그런 사람의 가게를 고른 걸까?"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이상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이치노세라는 이름의 오너와 어르신, 그리고 오미연합의 사채업자.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느낌이야."
"..."
"키류, 너 나랑 같은 생각하는 거지? 우리 당장 가자."
"도구, 같은 게 필요할까?"
"긴자라니까. 거기서는 소리만 질러도 모든 주목을 받을껄. 신사답게 가자. 되도록 조용하고 멋지게 이 일을 끝내자고. ... 뭐, 정 안되면 그때서야 너랑 내가 힘을 합해서 쓸어버리면 되고"
짧아진 꽁초를 구두 끝으로 눌러 끄며 니시키야마는 키류의 어깨에 올린 손을 토닥였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싶었는데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미래에 초조해지는 마음은 숨기기 힘들다.
"그래."
"그럼 이 복장은 좀 그러니까 나는 옷을 갈아입고 올게. 너는... 그대로도 괜찮을 거 같다. 쳇, 그 검고 촌스러운 복장이 카무로쵸 밖에서는 통할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대신 그 목걸이랑 문장배지는 떼고 와."
"응."
"한 시간 뒤에 택시 정류장에서 보자. 아니, 미안. 전철역에서 보자. 돈을... 아껴야하니까."
한결같이 표정 변화가 적은 키류였지만 녀석도 긴장된 마음은 다르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친형제와 다름없는 녀석이니까 눈동자만 봐도 읽어낼 수 있다. 늦지 말라는 말을 건네고 니시키야마는 먼저 신사를 빠져나왔다.
키류가 시간관념에 루즈하다고 항상 잔소리하는 녀석이기에 절대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형체가 니시키야마인 것을 깨닫자 키류는 입출구 옆 기둥에서 숨겼던 몸을 드러냈다.
"뭐야 그 복장은?"
"너한테 패션에 대한 지적은 받고 싶지 않아. 이게 긴자 스타일이지."
"어딜 봐도 호스트 녀석이잖아."
"웃기지마."
빌린 복장인지 남색의 단색 양복은 니시키야마에게 조금 작아보였다. 검은 구두 위로 살짝 드러난 짙은 색의 양말과 껑충 올라간 소매 밖으로 드러난 도금 손목시계, 거기에다 질끈 묶은 머리까지. 키류의 눈에는 텐카이치 거리에서 여자들에게 수작을 거는 껄렁한 호스트와 다를 바 없는 차림새였다. 긴자로 이동하는 전철 안에서 긴자 패션을 모른다고 니시키야마가 줄곧 항의했기에 키류는 할 수 없이 네 말이 맞다고 해줬다.
"... 나 긴자는 처음이야."
긴자역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니시키야마는 고백하듯 속삭였다. 도쿄생활은 카무로쵸 삼 개월이 전부인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거리 분위기에 위축되었다. 높고 화려한 양식의 빌딩숲을 걸어 다니는 남녀노소는 모두 차분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고 심지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도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간다.
"신경 쓰지 마, 니시키. 겉모습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응? 으응..."
역시 잡지로만 배우는 패션에는 문제가 있다. 다음부터는 직접 현장에 나가 관찰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니시키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카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상호명은 '카페 타이거'래. 특이한 이름이네. 여기서... 아! 저기 유명한 문구점 뒤쪽으로 들어가면 금방 나온다고 했어."
니시키야마의 검지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고 앞장섰다. 키류도 이름은 알고 있는 오래된 문구점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피해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높고 낮은 건물들 사이사이에 레스토랑과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카무로쵸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호객꾼도 대낮의 길바닥에서 잠든 술꾼도 없는 고즈넉한 거리였다.
"유코가 한번 와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다음에 데리고 오자."
"응. 분명 좋아할 거야."
장기입원을 하고 있는 니시키야마의 여동생을 두고 둘은 항상 긍정적인 이야기만 나눈다. 그러나 큰 수술을 몇 번이나 견뎌낸 유코는 병원 밖을 나서는 일조차 드물었다. 힘들게 절약해가며 모아뒀던 돈까지 쓰며 카자마의 일에 니시키야마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유코의 수술비를 대부분 카자마가 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키류, 저기"
앞서던 키류의 팔을 잡아 세운 니시키야마가 어느 회사 건물의 일층에 걸린 간판을 손짓했다. '카페 타이거'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 아래에 있는 모양이다. 예스러운 나무 간판에 우아한 붉은색으로 쓰인 글자와 황금빛 조명, 손 글씨로 적힌 메뉴판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들어가 볼까?"
말을 꺼낸 건 니시키야마였지만 먼저 앞장서는 건 키류다.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서는 키류를 지켜보다 니시키야마는 마른 침을 삼키고 뒤따랐다.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잔잔한 클래식 음악에 오히려 긴장된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오직 나무로 된 입구만을 응시하며 내려오던 두 사람은 돌연 옆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발을 멈췄다.
"저런, 놀라게 해 죄송합니다."
검은 양복바지에 같은 색 베스트를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낸 중년의 남자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외국의 신사처럼 가볍게 허리를 내렸다. 빳빳한 새하얀 와이셔츠에 한손에 장갑까지 낀 모습을 니시키야마가 공부 겸 살펴보는 사이 키류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다가가 섰다.
"당신이 이치노세인가?"
"이치노세... 오너에게 무슨 용건이 있으신 겁니까?"
남자는 당황한 기색 없이 키류를 마주했다.
"그렇다. 물어볼 말이 있어."
"죄송하지만 오늘 오너는 출근하지 않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주시겠습니까? 명함이 있으시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내일? 명함?"
뒤에 선 니시키야마에게 어떻게 할까, 라고 눈길로 신호를 보냈지만 니시키야마도 이런 경우는 생각해두지 않은 모양인지라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게다가 온갖 핑계를 대로 사무실을 나왔기에 내일도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당신이라도 시간을 낼 수 없는가?"
"저는 이곳의 지배인입니다. 아마 두 분이 원하시는 대답은 들을 수 없으실 겁니다."
중년의 남성은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 양해를 바란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작지만 또렷한 눈동자는 똑바로 키류의 시선을 받아쳐내고 있었다. 어설픈 변장으로는 감출 수 없었던 건가, 아니면 남자 또한 같은 세계의 사람인 건가. 너희들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멀리서 오신 듯한데 이왕 찾아주신 거 차라도 한잔 어떠십니까? 지금 시간이면 두 분이 편히 이야기를 나누시기에 좋은 좌석이 몇 남아있습니다."
"엄청 비쌀 거 같아."
키류의 귓가에 속삭이는 니시키야마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카무로쵸의 정보상에게 얼마를 주었는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수완 좋은 녀석이 이런 걸 보면 엄청난 이용료를 냈겠구나, 하고 헤아렸다.
"이곳은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 긴자의 다른 카페보다는 조금 가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만큼 즐거운 시간이 되실 겁니다."
"... 여기 이상한 곳 아니야? 그 챔피언 거리의 몇 가게들처럼"
"어르신이 그런 곳에 갈 리가 없잖아."
키류와 니시키야마가 소곤소곤 떠드는 걸 남자는 변함없는 인자한 미소로 지켜봤다.
"계속 이렇게 입구에 서 계시면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 하십니다."
"안내해줘."
"키류!"
우아한 동작으로 입구의 문을 열어주는 남자를 따라 키류는 발을 옮긴다.
"에라, 모르겠다. 모자라면 이 옷이라도 벗어주지 뭐."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 키류를 따라 니시키야마는 할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클래식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하게 공간을 떠도는데 왠지 모를 긴장감에 니시키야마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톤을 맞춘 초콜릿색 앤티크 가구들 사이에 놓인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지배인이라던 남자가 주고 간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카페 알프스보다 세배는 비싼 가격에 각자 가장 저렴한 음료를 찾아 눈을 재빠르게 굴린다.
"키류, 사실 나 배고픈데"
"나도"
"나는 오렌지주스"
"... 나도"
다행히 아까 니시키야마에게 주려고 했던 돈으로 계산할 수는 있겠다. 카페 진입이라는 하나의 산을 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본래의 임무를 다시 떠올렸다. 열 개 정도의 테이블이 놓인 카페 안에는 반 정도의 좌석이 차있었고 계산대 뒤의 사무실로 보이는 곳을 제외하면 딱히 감추어진 공간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카자마가 이곳에 왔다면 지금의 두 사람처럼 훤히 뚫린 홀에서 오미연합 쪽 인물을 만난 것이 된다.
"이치노세라는 이곳의 오너는 내일 온다고 했지? 그럼 카자마 어르신이 오는 날과 겹쳐. 우연일까?"
키류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 카자마 어르신이 또 여기 오실까? 키류, 역시 내일 왔어야 했나? 아니지, 그랬다가는 어르신과도 마주쳤을 테고... 아아, 복잡해. 역시 이런 일은 나하고 안 맞아."
"포기하지 마, 니시키. 하나라도 알아가면 돼."
"너는 진짜 긍정적이라니까. 알았어. 그나저나 여기 분위기는 좋다. 여자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손님은 전부다... 아저씨들이네."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한 두 사람은 퍼뜩 눈을 마주했다. 아저씨들뿐인 긴자의 고급 카페라니. 혹시 이 사람들 전부 야쿠자 관계?
"아니, 니시키. 저길 봐라."
굳었던 표정을 풀며 키류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을 가리켰다. 음료와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종업원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검은색 원피스 위에 커다란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에이프런을 덧입고 있었다. 니시키야마보다 짧은 단발머리 위에는 에이프런과 같은 재질로 만든 머리띠를 했다. 지배인과 마찬가지로 서양 드라마에 나오는 차림새다.
"아! 잡지에서 본 적 있어. 여기였구나. 외국의 메이드 콘셉트를 한 카페가 긴자에 생겼다는 기사를 예전에 봤는데"
그제야 호기심에 반짝이기 시작한 눈동자로 니시키야마는 여기저기 가게 안을 살핀다. '오오, 역시' 줄줄이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시끄러울 정도다.
"메이드?"
"응. 서양의 음... 하녀?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어졌지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왜 예전 드라마에 자주 나왔잖아."
"잘... 모르겠군..."
"이야... 여길 와 보다니. 어쩐지... 응! 이런 이유라면 가격이 비싼 것도 이해되지. 우리 꺼는 언제 나오지?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들뜨지 마라, 니시키. 우리는 어르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온 거야."
"알아 알아. 알지만 재밌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낯설면서도 고요한 이 공간이 키류는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카자마가 메이드 카페라는 특별한 장소를 골랐다는 것이 묘한 감정을 갖게 했지만 우선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주인님, 부탁하신 오렌지주스 두 잔입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응."
"오늘도 멋지시네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작은 꽃이 수놓인 테이블보 위에 두 개의 유리잔을 내려놓은 종업원은 동그란 은쟁반을 가슴에 안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마치 아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태도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오렌지주스의 잔을 잡으려는데 옆 자리에 앉은 니시키야마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키류..."
"응?"
"아까 그 메이드... 남자였어."
"뭐?"
"남자라고!"
키류의 팔을 부여잡은 니시키야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본 종업원의 뒷모습은 키류의 눈에는 영락없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다.
"난 보면 알아. 챔피언 거리에서 교육받았으니까. 내 눈은 속일 수 없다고"
"아마 이 카페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겁니다. 여기 이 신사 분을 제외하면"
"헉!"
놀란 니시키야마가 키류의 팔뚝을 쥐어짜는 바람에 잡고 있던 유리잔에서 주스가 흘러 넘쳤다. 어느샌가 뒤에서 다가온 지배인이 두 사람의 테이블에 주문하지 않은 조각 케이크를 올렸다. 커다란 딸기가 올라간 옅은 분홍색 생크림 케이크 두 조각이었다.
"우리는 주문하지 않았어."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겁니다."
"당신도 이쪽 세계의 남자인가?"
눈앞에서 움직이는 지배인의 왼쪽 손등은 가리지 못한 상처로 거칠었다. 키류는 한눈에 그것이 싸움으로 인한 흔적이라는 걸 알았다. 다부진 팔뚝을 따라 눈을 들어 지배인의 얼굴을 노려봤다. 밝은 조명 아래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나이가 들어 카자마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아주 오래 전, 두 분이 태어나기도 전. 한때는 말입니다."
"그럼 역시 이치노세도?"
"개인적인 일은 직접 물어보시지요. 물론 만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카자마라는 남자를 아나?"
"키류!"
이미 늦었다. 어차피 니시키야마가 말려도 키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밀어 붙이는 녀석이다. 카자마의 이름을 들은 상대가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 몰라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는 사이, 지배인은 지우지 않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카자마 님이라... 죄송하지만 손님들의 신상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다."
"이곳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분들이 손님이십니다. 그래서 두 분과 같은 청년의 방문은 아주 드물고요."
"여긴, 어디지? 고쿠도들의 비밀회의 장소라도 되는 건가?"
"손님!"
쉿! 지배인의 가늘고 긴 검지손가락이 그의 입술 위에 닿았다 떨어졌다. 옆 테이블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풍채 좋은 남성이 불편하다는 시선으로 키류를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되돌렸다.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사회생활에 지친 분들이 작은 위로를 찾고자 오는 곳입니다. 홍차 한잔과 달콤한 케이크, 그리고 친절한 메이드들에게 여유를 되찾고 다시 저 전쟁터 같은 사회로 나가는 휴게소 같은 곳이지요."
"남자 메이드를 통해서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건 전적으로 오너인 이치노세의 취향입니다. 이치노세는 남녀의 역할을 나누는 걸 싫어해서. 아니, 사실은 이쪽이 더 경쟁력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업에는 일가견이 있는 남자라. 이 나라에 메이드 카페라는 걸 들여오면 너도나도 따라할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렇다면 처음부터 허들을 높여 따라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럼 이치노세 씨는 평범한 사업가인가요? 조직의 사람이 아니라?"
한동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니시키야마는 눈앞의 붉은 보석 같은 딸기에 요동치는 배를 토닥이며 물었다.
"이 긴자에 그분의 이름을 가진 빌딩이 몇 채 있습니다.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만. 오너가 소속된 조직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까의 말대로 직접 본인에게 확인해주십시오. 거기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군요."
긴자의 성공한 사업가와 오미연합 직계조직의 의형제인 소텐보리의 사채업자와 카자마.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이야기에 둘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이치노세를 직접 만나고 싶다. 내일 오면 되는 건가?"
"혹시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재력가들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키류와 니시키야마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무척 의심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몇 번이고 그들의 돈을 노리고 접근해오는 난폭한 사람들을 만나왔으니까요. 아마 이치노세, 라는 이름이 불리자마자 도망갈 겁니다."
카자마가 내일 다시 이곳에 나타나도 몰래 사채업자와의 관계를 알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카자마는 누구보다 예민하고 감이 좋은 남자였다. 만약 내일 카자마가 카페에 오지 않는다는 변수가 생겨도 이치노세를 만나지 못한다면 도지마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목요일 저녁, 히라타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해 카자마를 위험에 내몰 것이다. 이곳의 오너인 이치노세를 만나 그가 이 장소가 (조금 특이한 요소는 있지만) 평범한 카페라는 것, 나아가 카자마와 사채업자가 단지 친분이 있어 별 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의 신뢰성 높은 증인이 되어준다면 히라타의 공격을 반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어쩌지, 키류?"
에휴, 여기까지 인가봐. 니시키야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깨작깨작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생각이 막히면 단 걸 먹어야 한다고 늘상 이야기해왔지만 이 케이크를 다 먹어도 좋은 방도는 떠올리지 못할 거 같아 우울했다.
"두 분은 오너를 만나고 싶은 겁니까? 그 카자마라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거군요?"
"그렇다."
"흐음... 카자마, 카자마 님이라... 혹시 올백 머리를 한 콧수염이 멋진 손님인가? 아닌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지배인의 행동을 두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흐음...' 하는 감탄사를 반복하던 지배인은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당신, 역시 카자마 어르신을 아는 거군."
"어쩌면 오너의 오랜 친구 분들 중 한 분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치노세의?"
그렇다면 카자마는 사채업자가 아닌 이곳의 오너를 만나기 위해 긴자를 방문한 걸 수도 있다. 사채업자와의 만남은 우연의 우연이었을지도. 이치노세의 증언만 있다면 손쉽게 누명을 벗을 수 있다.
"역시 일개 지배인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치노세 씨를 만나게 해줘요! 사례는! ... 사례는...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니시키..."
"매우 간절해 보이시는군요.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이치노세는 무척 의심이 많은 남자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이 가게에 와서도 지배인인 저와 이곳의 메이드들과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고는 돌아갈 뿐이지요."
안타깝다는 의미로 휘어진 지배인의 두꺼운 눈썹 밑의 눈이 동정심을 담아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가진 돈은 정보상에게 다 써버렸지만 카무로쵸의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한다면 어떻게든 목돈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니시키야마는 이미 돈을 빌릴 리스트 작성도 머릿속에서 끝마쳤다. 절대 빚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아버지와 다름없는 카자마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에휴..."
사례를 해도 이치노세를 만날 수 없는 거라면 말짱 소용없는 일이지만.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키류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이제 그만 일어서자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제 이야기에서 힌트가 보이셨습니까?"
"그래."
키류의 대답에 니시키야마는 깜짝 놀라 지배인과 키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메이드... 가 되면 되겠군."
"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메이드들과 달리 어떻게 꾸며도 만족스럽지 않을 거야."
"이곳의 손님들은 여성스러운 메이드를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자신들과 같은 남성이면서도 그들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는 메이드들을 찾아오는 겁니다. 분명 두 분은 훌륭한 메이드가 되실 겁니다."
"자신 없지만... 하는 수 없지."
"네 멋대로 결정하지 말라고!"
키류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한번 정한 것을 번복하지 않는 게 키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금세 포기한 니시키야마는 '젠장, 젠장' 읊조리며 케이크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때로는 가장 어려워 보이는 길이 가장 쉬운 길일 수 있습니다. 생각이 정해지시면 내일 아침 8시까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지배인은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이고는 옆 테이블로 가 아까의 소란을 사과했다.
카무로쵸로 돌아가는 만원 전철 안에서 두 사람은 창에 비치는 각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마도 이 얼굴에 덧입혀질 메이드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키류, 생각해봤는데"
니시키야마가 내키지 않는다면 혼자 하겠다고 말해주려 한다. 너는 큰돈을 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움직이겠다고. 그런데 니시키야마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뭘?"
"작전명"
"작전명?"
"원래 이런 비밀스러운 임무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작전명을 붙이잖아."
"이제 와서?"
"내일이 진짜니까. 아무튼 생각해봤는데 JNK 어때?"
"JNK?"
"어르신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놈들을 저지먼트하려는 니시키야마와 키류라는 뜻이야."
어때? 아이돌 그룹명 같아서 멋있지? 하는 니시키야마는 이미 메이드가 될 생각은 굳혔는지 내일은 또 무슨 핑계를 대고 사무실을 쉬어야 하나, 오늘밤에는 얼굴 마사지를 해야 하네, 아침에 수염 잘 깎아야지 하는 말들을 혼자 떠들어댔다.
"그런 거라면 JKN이지. 내가 생일이 더 빠르니까."
"... 하여튼 넌 그런 작은 거에 까다롭다니까. 알았다. 좋을 대로 해. 그리고 너도 내일 수염 잘 깎고 와. 수염 달린 메이드라니 으... 싫다."
"아까 지배인의 설명 못 들었어?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다잖아."
"내가 싫어서 그래. 아무튼 치마가 기니까 다리털까지 밀 필요는 없겠지만 드러나는 부분은 신경 좀 쓰자고"
"귀찮게..."
"키류! 내일이 승부야! 우리가 믿을 사람은 그곳의 오너뿐이라고. 그 겁쟁이 오너를 구슬리려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렇게 하기 싫다고 찡찡거리더니 이제는 도리어 키류에게 충고하는 모습이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보라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저녁노을이 퍼진 카무로쵸 방면의 출구로 올라서자 밤의 세계로 향하려는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방황하는 광경이 보였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 배를 채워야 했기에 두 사람은 인파를 비집고 서둘러 카무로쵸 안으로 뛰었다.
3.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카무로쵸 대로 건너의 회사거리로 출근하려는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 복장의 니시키야마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제의 호스트 차림을 버리고 본래의 스타일로 돌아온 니시키야마는 하품을 하는 키류에게 서두르자는 한마디만 했다. 두 사람이 과하게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건 어젯밤 카자마가 도쿄를 떠나 타 지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황해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에게 카시와기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카자마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나서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키류, 이제 이 일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어."
"응."
"카자마 어르신은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게 분명해. 히라타 형님, 아니 히라타 녀석은 내일 터뜨릴 생각으로 신났겠지만 어림없지. 우리가 꼭 이치노세를 만나서 어르신이 결백하다는 증거를 잡자고"
두 번째 긴자는 무섭지 않다며, 평소보다 유난히 매끈거리는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지은 니시키야마가 앞장선다. 이른 시각,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문구점과 백화점, 레스토랑을 지나 카페 타이거의 입구에 도착했다. 니시키야마가 손등을 내밀자 키류는 마지못해 그 위에 손을 포갰다.
"작전명 JKN은 반드시 성공한다."
"오우"
"힘이 없잖아, 키류."
"시끄러워. 파이팅."
"키류!"
다시 파이팅을 힘차게 외쳐야한다고 주장하는 니시키야마를 놔두고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 문을 두들겼다. 천천히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키류를 위아래로 훑더니 누구인지 알았다는 듯 ‘아’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오라 문을 열어줬다.
"어제 오셨던 분들이죠?"
키류와 그 뒤에서 쭈뼛거리다 들어온 니시키야마를 돌아보며 남자가 씩 웃었다.
"엇!"
어제 오렌지주스를 가져다준 메이드였다는 걸 알아챈 건 니시키야마뿐이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의 지배인을 부른 남자는 카운터에 기대어 세워놓은 마른 대걸레를 들고 나무 바닥을 광내기 위해 카페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셨군요. 그럼 우선 이쪽으로. 몇 가지 교육을 해야 하니까요. 물론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극히 기본적인 확인일 뿐"
"우리도 청소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원래 오픈 준비는 타쿠미 군 혼자서 하고 있으니. 저렇게 보여도 우리 메이드들 중에서는 가장 힘도 세고 청소도 좋아하거든요. 자, 사무실로"
카운터 뒤쪽의 문 안에는 예상대로 넓은 사무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방문한다는 오너 이치노세의 텅 빈 책상 옆 행거에 줄지어 빼곡하게 걸린 메이드복이 투명한 비닐을 뒤집어쓴 채 입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지배인은 이곳에서 사이즈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으면 된다는 설명을 한다.
"당신의 이름은? 지배인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메이드복을 고르는 니시키야마의 뒤에서 쉬이 손을 뻗지 못하고 있던 키류는 명찰이 달리지 않은 지배인의 가슴부위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냥 '지배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름 같은 건... 의미 없으니까. 이곳의 메이드들도 손님에게 이름을 알릴 필요가 없기에 명찰을 달지 않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여러분을 불러야 하는 일도 생기기에. 뭐라고 부를까요?"
"키류 카즈마"
"바, 바보야! 본명을 알려주면 어떻게 해?!"
한손에 메이드복을 든 니시키야마가 급히 가로막았지만 또 늦었다. 지배인은 그럼 카즈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저는... 아키라..."
"아키라. 응, 좋은 이름이군요. 밝을 창(彰)이라는 한자를 씁니까?"
니시키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해바라기를 나온 뒤로 카무로쵸에서 아키라라고 불렸던 적이 거의 없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자신의 이름조차 낯설어지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별거 없습니다. 즐거운 생각을 하며 응접하면 됩니다. 손님을 부를 때는 '주인님', 당연히 경어를 써야 합니다. 특히, 카즈 군."
"알겠다."
"음... 지금은 괜찮지만 오픈 후에는 저에게도 경어를 써주시길 바랍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던 지배인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는 낯선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손님은 주인님, 메이드는 주인님을 오래 봐온 가까운 인물입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편히 지내세요.' 라는 감정을 전달해야 합니다. 어려울 거 같지만 이것도 별거 아닙니다. '오늘은 파란색 넥타이를 매셨네요. 잘 어울리십니다. 오늘은 커피를 드시는군요. 멋진 선택입니다' 같은"
"어려울 거 같은데, 그치?"
메이드복의 비닐을 벗기며 니시키야마는 키류에게 말을 걸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짙은 색의 원피스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어느 회사의 섬유유연제를 쓰고 있는 거냐고 나중에 물어야겠다.
"생각이 안 나면 '맛있게 드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정도로 좋습니다. 이곳은 풍속점이 아닌 카페이니까."
"명심하지."
"자, 그럼 제일 중요한 서빙을 연습해봅시다.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타쿠미 군에게 시범을 부탁하는 게 좋겠군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됩니다."
문 밖으로 나가려던 지배인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발길을 멈췄다.
"수염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온 점은 칭찬하겠습니다. 카즈 군, 앞머리를 내리는 건 어떨까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왕이면' 입니다. 그 미간의 주름을 가릴 수 있을 테니. 아키라 군은 완벽하군요. 그럼"
지배인이 사무실을 나가자 니시키야마는 역시 내말이 맞지 않냐며 싱글거리는 얼굴로 키류에게 메이드복을 하나 건넸다.
"여기. 이 사이즈면 너한테 맞을 거 같다."
"니시키, 이거 어떻게 입는 거지? 이게 앞인가?"
"지퍼가 있는 쪽이 등 쪽이야. 응, 내 말대로 하얀 양말을 신고 왔군. 잘했어."
"귀찮게..."
"잊지 마, 키류. 이건 일이야."
어느새 에이프런까지 걸친 니시키야마는 긴 벽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머리띠를 썼다 벗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위치를 찾는다.
"앞머리 내려. 왜 멋대로 왁스를 바르고 온 거야?"
"... 그런 말은 없었잖아."
"하긴. 이제 뒤 돌아봐. 이건 리본으로 해야지. 포로로 잡혀온 것도 아니고"
리본을 묶는 건 아주 쉽다며 키류의 에이프런을 고쳐주는 거울 속 니시키야마의 표정을 보아 지금 유코를 생각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여동생의 머리카락을 매일 아침 빗겨주던, 잊고 있었던 오랜 풍경이 떠올라 키류는 슬쩍 웃었다.
두 사람보다 한참 연상인 타쿠미는 벌써 카페 타이거에서 일한지 반년이 넘었다고 했다. 자신은 긴자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둘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냐는 물음에 니시키야마는 학교는 안 다니고 아버지의 일을 배우고 있다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닌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타쿠미는 그 이상을 캐묻지 않았다. 이곳은 특별한 메이드 카페이지만 손님들은 대부분 착하고 시급도 좋으며 지배인과 오너도 친절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치노세 오너를 만난 적 있어?"
"응. 수요일마다 오니까. 겉모습은 되게 평범한 아저씨야."
"무섭지 않아?"
"전혀. 사실 처음에는 남자 메이드라니 분명 변태다! 의심했는데 딱히 문제도 없고. 지배인한테 왜 이런 카페를 하기 시작했는지 들은 후에는 나도 납득해서. 오너는 해외도 많이 나가고 한대. 유명한 자산가라고 하더라고. 나는 잘 모르겠지만."
"흐음... 그렇구나."
나서서 타쿠미와 친목을 쌓는 건 니시키야마였다. 여자의 구두를 본뜬 볼이 좁은 구두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는 키류가 쟁반을 든 채 지배인에게 걸음걸이 지도를 받는 사이, 니시키야마는 테이블을 정리하는 타쿠미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혹시 오너와 친한 남자 손님을 알아? 키가 크고 머리를 키류, 아니 카즈처럼 넘기고 콧수염이 난. 수요일마다 다른 손님과 같이 온다는데"
"카자마 씨?"
타쿠미가 카자마의 이름을 내뱉자 일자 걸음을 연습하던 키류도, 테이블을 펴던 니시키야마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하던 동작을 멈췄다.
"오너의 친구 분이시죠? 오사카에서 오시는 소노다 씨와 함께 수요일마다 체스를 두시는. 맞죠, 지배인님? 지배인님과도 아는 사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글쎄. 나는 기억이 잘 안 나서. 자, 카즈 군, 다시 한 번 주방에서 저 끝까지 걸어볼까요? 미간을 조금 풀고"
"당신, 카자마 어르신을 알고 있었군."
길게 내려온 앞머리로도 가리지 못할 주름을 잔뜩 만든 미간 양옆의 서늘한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내며 지배인은 인자한 웃음을 한치도 흩뜨리지 않았다. 대신 키류의 구겨진 어깨 쪽 에이프런을 손으로 반듯하게 펴줬다.
"타쿠미 군은 젊고 똑똑해서 기억력이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잘 모르겠군요. 오너의 친구 분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이곳을 찾아 시간을 보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내가 외우고 있는 얼굴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를 속였지! 지배인 당신, 어르신을 잘 알고 있었던 거야?!"
공들여 쓴 머리띠를 거칠게 잡아 벗어내며 니시키야마는 키류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음, 그렇다고 하면 이대로 돌아갈 겁니까? 오너가 아무나와 만나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두 분은 오너를 만나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카자마라는 분이 이곳을 왕래한다는 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였습니까?"
니시키야마는 키류의 얼굴을 돌아봤다. 지배인의 말대로 변하는 건 없다. 왜 그가 타쿠미도 아는 카자마를 모르겠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안다고 해도 키류와 니시키야마가 이치노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은 똑같다. 카자마는 내일에서야 출장을 마칠 테고 저녁에는 도지마가 사무실로 돌아온다.
"어쩌실 겁니까? 두 사람이 지금 일을 관두면 기껏 휴일을 받은 두 명의 직원을 다시 출근시켜야 하니까요."
지배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키류는 비틀거리는 불편한 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가더니 들고 있던 은쟁반 위에 빈 유리컵들을 거친 손짓으로 몇 개 주워 올렸다.
"다시 해보지."
"좋습니다. 걸음걸이가 점점 좋아지고 있군요."
박수를 친 지배인은 테이블 사이를 8자로 빠져나가는 키류에게 이런 저런 어드바이스를 계속했다. 키류가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위아래로 요동치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멍하게 바라보다 니시키야마도 타쿠미의 곁으로 돌아간다. 이따가 다시 거울을 보며 머리띠를 고쳐야겠다. 아까의 위치가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들으셨듯이 수요일은 평소보다 많은 손님이 카페 타이거를 찾아주십니다. 오너의 친구 분들은 대부분 재력가, 정치인, 교육가, 학자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위엄을 숨기지 못하시는 분들이지요. 이 문 밖에서는 누구보다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들이지만 이곳에서는 단지 우리들의 주인님. 그 분들은 새로운 메이드의 등장을 누구보다 즐거워하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어느 가게에도 지지 않는 메이드가 되어달라는 말을 지배인은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전 10시. 오픈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순식간에 만석이 된 테이블을 앞에 두고 키류는 주방 쪽 카운터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주문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열 개의 테이블이니 그리 힘들지는 않겠지, 하고 방심하고 있던 니시키야마는 이리저리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깨닫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유롭게 움직이는 타쿠미가 있어 다행이었지 키류와 둘 뿐이었다면 이제 그만 다들 돌아가 달라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어이, 키류! 뭐하고 있는 거야?!"
"3번 테이블이 어디지?"
"3번? 우리가 어제 앉았던 구석 자리가 1번이니까 하나, 둘, 셋. 저기네. 장식장 앞의 하얀 머리의 할아버지 손님"
"할아버지가 딸기 핑크 베리베리 스무디를 먹는 건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할아버지는 딸기 핑크 베리베리 스무디를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빨리 갖다 드려. 기다리시잖아."
호통을 듣고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홀에 나서는 키류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니시키야마의 코도 석자다. 타쿠미의 말대로 이곳의 손님들은 점잖고 화도 내지 않지만 '홍차가 식었으니 뜨거운 물을, 다른 맛을 보고 싶으니 새로운 찻잎을, 컵이 무거우니 좀 더 작고 가벼운 걸로, 밀크를, 이 커피에 어울리는 케이크를, 음~ 맛있으니 같은 걸로 하나 더, 내가 커피 리필을 부탁했던가, 미안하지만 뜨거운 물로 가져다주게, 크레이프 케이크는 우리 손주가 좋아하지만 나는 별로니까 생크림 케이크로, 생각해보니 크레이프도 괜찮을 거 같군, 오늘은 어디의 케이크인가, 오므라이스의 소스를 따로 주겠는가, 나는 케첩으로 꽃을 그려주게, 파스타의 면은 조금 딱딱하게, 새우 알레르기가 있는데 해물 파스타에서 새우를 빼주게, 이 파스타를 먹은 후에 어울리는 건 산미가 강한 커피겠지, 아니 그 반대였던가, 지배인이 저번에 추천한 커피콩이 아직 있다면 그걸 가져다주게. 역시 산미 쪽이 좋았을 듯싶군. 이번에는 다른 풍미로 한잔 더' 하는 통에 울고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다.
"주인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기 음... 딸기 핑크 베리베리 스무디입니다."
"오! 기다렸다네. 딸기 핑크 베리베리 스무디! 이제 딸기도 마지막 철이니까. 이곳의 딸기는 모두 지배인이 손수 골라 사용하지."
스무디 맨 위에 올라가 있는 작은 딸기가 무너질까, 키류는 조심조심 테이블 위로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이것 보게. 이렇게 모양도 예쁜 딸기라니."
배가 나온 하얀 머리의 노신사는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덮어 옆으로 밀어내며 앞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자신의 스무디를 마치 대단한 물건인 양 칭찬했다.
"스무디라니. 건강이 안 좋다더니 그렇게 차가운 걸 먹어도 괜찮은 건가? 자네는 이곳의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않았나."
"지금 시즌의 자몽은 캘리포니아의 것이니까. 물론 그것도 맛있지만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산이 더 좋아. 그리고 집에서는 잔소리가 심하니 이렇게 타이거에서 먹고 가는 거지. 아, 메이드 군. 사실 자몽은 캘리포니아산이 더 맛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왜 그런 소문이 있는 건지 아는가?"
"음... 글쎄, 오렌지가 나오기 때문 아닐까. 이곳의 오렌지주스는 맛있더군."
"호오. 새로운 의견일세. 오렌지라... 오렌지를 키우는 공법을 자몽농사에도 접목시키고 있다는 건가. 그런 논문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찾아보지."
"그리고 스무디는 너무 차가우니까 조금만 먹는 게 좋아. 배탈이 나니까."
"고맙네. 내 건강도 걱정해주는군. 역시 이곳의 메이드는 친절해."
그럼, 하고 인사 후 돌아서는 키류의 얼굴은 변함이 없다. 아수라장에서도 저 녀석은 진흙 속에 홀로 핀 연꽃처럼 도도하게 있다가 가끔 잔바람 따라 고요히 흔들거리기만 할 거란 생각을 하며 니시키야마는 5번 테이블에서 자신을 부르는 손님에게 곧 가겠다는 뜻으로 경례를 했다.
적응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요령을 터득해간다. 정오를 지나 런치타임이 끝났을 때는 키류도 더 이상 테이블을 틀리지 않았고, 니시키야마도 더 이상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먹었다,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아, 이런 게 노동의 즐거움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가게의 방침에 따라 따로 팁을 받지 않기에 전부 거절했지만 지배인의 설명대로 모두 대단한 사람들인 듯 그들이 내밀었던 팁을 모으면 꽤 큰돈이 될 거라 짐작했다.
"키류, 여기 괜찮은 거 같아. 밥도 많이 주고"
"응. 딸기 어쩌고 그것도 꽤 맛있더군."
조금 한가해진 가게의 테이블을 치우면서 두 사람은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바쁜 반나절이었다.
"크크, 키류, 너 머리띠 다시 해. 이제 수염도 올라온다."
"시끄러워. 너도 똑같아."
뭐가 웃긴 건지, 둘은 쟁반 위에 빈 접시들을 올리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에 손님이 남아 있어 참아야 했지만 그래서 더 참기 힘들었다.
"아키라, 카즈.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가던 타쿠미가 다가와 따라 웃으며 물었다. 역시 선배는 달라서 아침과 거의 달라진 점도 없이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한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너희, 오너를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응?"
"이치노세 씨 말이야. 이미 만난 거야? 아까 사무실로 들어갔잖아."
"뭐?!"
"키류, 어쩌지?"
"타쿠미, 이 그릇들을 부탁하지. 우리는 오너를 만나야 한다."
"으응."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사무실로 향하려던 때였다.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리고 중절모를 쓴 남성이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 저분이 소노다 씨. 카자마 씨의 친구 분."
"저 사람이..."
"... 소노다"
"저 사람이?!"
무심결 외친 니시키야마가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빨개진 얼굴로 눈만 끔벅거리며, 왜 그러냐고 묻는 키류의 말에도 입을 열지 못한다.
"역시 아키라 군은 아는구나. 소노다 씨는 유명한 배우셨대. 지금은 은퇴해서 오사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 정도 오너를 만나러 와. 카자마 씨는 오늘 안 오시려나? 하긴 바쁘신 분이니까. 그럼 이건 내가 치울게. 어서 사무실에 가봐. 오너가 소노다 씨와 합석하기 시작하면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둘이 수다를 떨어서. 게다가 저녁 시간이 되면 또 바빠질 테니까."
타쿠미가 테이블 위를 치우고 나서도 둘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소노다라는 남자는 과연 눈에 띄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중년의 신사였다. 안내를 마친 지배인은 소노다의 테이블에서 멀어지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들이 기다리던 또 한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오너와 만나려는 겁니까?"
사무실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는 둘을 보며 지배인은 괜찮으니 사무실로 가보라 한다.
"카자마 어르신이 매주 만나러오던 사람이 저 남자인가?"
"아마도? 소노다 씨는 은퇴한 배우이지만 예전에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유명 정도가 아니잖아요?"
"호오, 아키라 군은 저 분을 잘 아는 모양이군요. 야쿠자 영화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었지요. 제작을 한 경험도 있고. 아는가요? '쌍룡과 같이' 라는 시리즈물도 소노다 씨의 작품입니다."
"쌍룡과 같이?! 그 등에 쌍룡 문신을 한 야쿠자가 파문당해 부동산으로 대성공을 거둔 뒤에 도쿄 한복판에 요상한 황금 동상을 세우는 그 영화 말이에요?!"
우와, 키류. 나 그 영화 완전 좋아해. 니시키야마는 빨간 두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흘끔흘끔 소노다를 훔쳐봤다. 물론 그 영화를 본 적도, 소노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키류는 단지 지금의 니시키야마가 메이드복과 잘 어울린다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아는 야쿠자 세계는 실제와 다르니까. 소노다 씨는 그래서 연기를 위해 많은 이들과 교류를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지배인은 손에 든 유리컵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무심히 말했다.
"그래서 오미연합과 의형제 관계였던 거였군. 그럼 카자마 어르신과도?"
"글쎄요?"
"하지만 사채업자라고 했는데... 정보상은 분명 오사카 소텐보리의 사채업자라고 했어."
"사채업자라... 그렇게 부르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낮은 이자를 쳐 돌려받는 일도 하고 있으니. 대부분 야쿠자 세계를 벗어나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있어서 원금조차 돌려받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자선사업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지배인은 소노다를 넘겨다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지배인과 소노다도 옅은 관계는 아닐 거라 키류는 예상했다.
"히라타 녀석, 완전 헛짚었잖아."
덕분에 우리는 이런 생고생을 했고. 니시키야마의 한숨은 땅을 꺼뜨릴 만큼 길었다. 카자마를 믿고 기다렸다면 자연스럽게 히라타의 실수로 귀결될 일을 키웠다. 자동차를 사겠다고 한두 푼 모았던 돈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럼 오너는 만나지 않으실 겁니까? 세 사람이 이 카페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체스 내기로 무슨 것들을 걸었는지 궁금하지는 않은 건가요?"
"이곳에서 오고 갔다는 서류는 뭐였던 거지? 내기에 걸었던 돈?"
니시키야마의 질문에 키류는 떠오르는 게 없어 고개를 저었다. 카자마가 체스를 둘 줄 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아마 그건 대본일 거야."
지나가던 타쿠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노다에게 커피를 내주고 빈 은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세 분은 모두 체스를 좋아하시지만 사실 오너와 소노다 씨는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게 하나 더 있거든. 오래된 영화의 대본집. 가끔 오너가 보여주고는 했어. 본인은 전혀 관심 없었는데 오사카에 사는 소노다 씨의 부탁으로 도쿄의 고서점들을 오가며 수집하다가 좋아져버렸다고. 카자마 씨도 같은 부탁을 몇 번 들어주고는 하셨나봐."
왜 그런 걸 좋아할까, 신기하지? 타쿠미는 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돌아갔다. 결국 오랜 세 친구의 어디 하나 잘못된 것 없는, 어디 하나 위험할 것 없는 평범한 만남이었을 뿐이다. 단지 한명은 동성회 직계조직의 주요 인물이었고, 다른 한명은 야쿠자 세계와 연이 깊은 은퇴 영화배우였고, 또 다른 한명은 겁 많은 자산가였을 뿐이었다.
"우정을 유지하는 데는 단 하나의 공통점만 있어도 되는 거니까."
지배인은 생각에 빠진 두 사람의 얼굴을 한명씩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과연 카자마가 항상 담담하게 자랑하던 두 아이는 어리고 거친 면은 있지만 부성애를 자극하는, 어딘가 눈을 뗄 수없는 귀여운 부분도 있었다. 키류는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지만 주위의 영향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성향을 지녔고, 니시키야마는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머리가 좋아 사고 회전이 빠르다. 어쩔 수 없어 조직에 넣었다는 카자마의 말에 화를 낸 자신이지만 과연 본인이 카자마와 같은 상황이었어도 자식 같은 이 두 녀석의 요구에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했을 거란 걸 오늘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안타까웠다. 그 세계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 이렇게나 씩씩한 아이들인데.
"이거 히라타 녀석한테 줄까?"
긴자역을 향해 나란히 걷다 니시키야마는 손에 든 종이봉투를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조각 케이크와 빵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큰형님한테 쥐어터질 거니까. 그 전에 맛있는 거라도 먹어두라고"
"차라리 날 줘. 내가 먹게."
"하긴, 아깝다. 내가 먹어야지. 아! 젠장, 섬유유연제 어디 껀지 안 물어봤다."
불편한 옷을 입고 이렇게 오랜 시간 움직여본 경험이 없었기에 파도처럼 몰려오는 피곤함에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번갈아가며 하품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오해로 인한, 하지 않아도 될 일에 힘을 쓴 사흘간의 고됨이 어찌되었든 풀렸기에 마음만은 편하다.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지. 그 소노다 씨의 사인도 받고. 언제 우리가 긴자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
"응."
"그것도 메이드복을 입고. 크흐흐... 키류, 너 좀 어울렸어. 언밸런스의 밸런스 같은 느낌?"
"뭐야, 그게"
"패션 세계에는 그런 게 있어. 다음에는 우리 손님으로 가자. 타쿠미 형이 일하는 날에"
발볼이 지금도 아프다는 키류를 다독여 니시키야마는 통행인이 줄어든 긴자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백화점과 고급 브랜드 가게들은 문을 닫았지만 이것만은 끝까지 남겨두겠다는 듯이 번쩍거리는 간판의 이름을 하나씩 읽으며 역으로 향한다. 역시 카무로쵸는 너무 좁아. 가끔은 이렇게 밖으로 나와봐야겠어. 니시키야마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건지 키류는 입에 문 담배의 연기를 하품과 함께 내뱉으며 느린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카자마에게는 오늘의 일을 영원히 비밀로 하기로 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메이드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지배인과 타쿠미에게는 둘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카자마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두었다.
"니시키"
"왜?"
"이거 줄게."
키류가 내미는 것은 오늘의 일당이 든 봉투였다. 됐다며 물렸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과장을 조금 보태 대꾸했다.
"그거 모아. 나중에 문신할 때 써야지."
"아"
일 년 카무로쵸에서 버티면 그때는 문신을 새겨도 좋다는 카자마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키류는 바지 주머니에 봉투를 구겨 넣고 니시키야마를 따라 전철역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간다.
"니시키,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고 나까지 빼낸 거야?"
"그거? 해바라기에 갔다 오겠다고 했어. 대청소를 도와주고 싶다고. 카시와기 씨한테"
"그랬군."
다른 사람에게는 금방 들킬 거짓말이었지만 카시와기는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니 문제없다.
"형님들이 뭐라 하면 카시와시 씨 이름을 대면 되니까. 아, 배고프다. 카무로쵸에 도착하면 뭐라도 먹자."
"아까 그렇게 먹어놓고"
"케이크니 파스타니 그런 건 간식이지. 진짜 밥이 아니잖아."
"마음대로 해."
늦어버린 퇴근을 서두르는 샐러리맨들의 뒤에 서 전철을 기다린다. 그들의 평범한 양복과 비교되는 복장은 딱히 시선을 끌지 못했다. 모두들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키류, 어쨌든 작전명 JKN은 성공했다고 치자."
"JKN?"
"저지먼트- 에효, 됐다."
고민해 만든 작전명은 결국 작전 요원의 한사람이 외우지 못한 관계로 흐지부지 사라진다. 약간 씁쓸했지만 카자마도 우리 두 사람도 모두 무사하게 끝났으니 그걸로 됐다. 다음부터는 절대 작전명 따위에 시간을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니시키"
"왜?"
"수고했다."
"너야 말로. 키류, 역시 우리 말이야, 힘을 합치면 진짜 최고야. 그렇지?"
팔꿈치로 키류의 가슴 아래를 장난스럽게 쿡 찌르고 니시키야마는 웃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무용담이었지만 키류와 이렇게 추억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자동차를 살 돈이야 또 모으면 되고.
"지배인은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그는 어떤 고쿠도였을까."
응, 그렇겠지. 키류의 혼잣말에는 동감하지만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단 하루의 출근을 허락해준 것도, 다른 목적이 있었음에도 흔쾌히 머물게 해준 것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이상하다. 그 이야기는 밥을 먹고 난 다음에 할 예정이었지만 큐슈 일등성에서 배부르게 라멘을 먹은 두 사람은 감기는 눈꺼풀에 서둘러 헤어진 후 다음날 저녁, 도지마의 배웅을 위해 사무실로 출근할 때까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 뒤에는 거짓 보고를 한 히라타 때문에 조직이 한번 크게 난리가 나 까맣게 잊어버렸다.
*
"오늘은 매상이 괜찮군. ... 근데 이 식사비용은 뭔가? 하마의 먹이라도 챙긴 건가?"
"그거 말입니까? 오늘은 특별한 손님들이 와서"
"뭐, 그런 거라면 됐어."
책상에 앉은 이치노세는 일주일간의 장부를 확인한 후 지배인에게 다시 돌려줬다. 마치 눈사람을 연상시키는 생김새의 이치노세는 소노다가 남기고 간 옛날 영화의 대본집을 손에 들고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자마 씨는 오늘 오지 않았어. 지난주의 체스 패배에 대한 설욕을 씻으려고 별렀는데"
"갑자기 출장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지배인은 입고 있던 베스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허리에 두르고 있던 검은색 앞치마를 풀러 각을 져 접었다.
"자네의 표정이 좋아보여서 오늘 카자마 씨가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티가 났습니까?"
입으로는 '저런, 실례했습니다.' 라고 했지만 일부러인 듯 연기는 부자연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벗은 장갑 밖으로 드러난 오른손의 중지와 검지는 두 마디가 없다. 거꾸로 든 장갑 안에서 내내 손가락 역할을 하던 나무 조각이 굴러 떨어졌다.
"한때는 친우였지 않은가. 이제는 화해할 때가 되었지. 시간은 자꾸 가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줄어들어. 나중에는 화해하고 싶어도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카자마와 저는 지금도 사이가 좋습니다. 원체 사교성이 뛰어나신 오너의 눈에는 한참 부족해 보이겠지만"
"흥, 거짓말"
"아, 오너. 또 이상한 동호회에 가입하셨습니까?"
"이상한 동호회?"
"그런 소문이 들렸습니다. 무슨 뒷세계 조직에 가입하셨다고"
동그란 눈을 한참 굴리던 이치노세는 생각이 떠오른 듯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혹시 전국 남성 메이드 협회를 말하는 건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회원들이 아무래도 아직은 부끄러운 모양이야."
"그러셨군요."
"나는 겁이 많아. 야쿠자 출신 친구는 있어도 칼 하나 못 잡는다고. 그들에게 배운 것 중 하나는 뒷세계 조직이라는 건 한번 이름을 걸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지. 그건 정말 무서워.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그 세계를 빠져나오고 수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드문드문 빈 손가락의 자리를 보면 불현듯 떨치지 못한 생생한 기억이 따라온다.
'한번 야쿠자는 영원한 야쿠자다. 발을 씻는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
그건, 자조석인 웃음과 함께 건넨 30여 년 전 카자마의 말이었다.
'절연할 때 손가락을 가져가는 건 지독한 짓이다. 손을 볼 때마다 기억들이 떠오를 테니까. 그리고 생각하는 거지. 아, 나는 죽을 때까지 야쿠자구나, 하고'
듣기 싫은 말만 골라하던 녀석이었다. 지금도 만나면 자연스럽게 얼굴이 찌푸려지는 오래 인연의 친우는 용케도 그 세계에서 버티고 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노다 씨에게 들었다네.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고?"
"오너의 덕분입니다."
"카자마 씨가 고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렇게 반대했다면서 결국 자네도 같은 일을 하다니. 뭐, 그런 면에서는 자네 말대로 사이가 좋다고도 할 수 있겠군."
"우정을 유지하는 데는 단 하나의 공통점만 있어도 되는 거니까요."
얇은 코트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지배인을 이치노세가 불러 세웠다.
"아키라 군, 다음 주 수요일에도 잘 부탁하네."
"... 다음 주에 뵙지요."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러 달라 간곡하게 요청해도 이치노세는 성이 너무 길다며 끝까지 이름으로 불렀다. 포기한지 오래이지만 오늘은 두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카페 타이거'의 불 꺼진 계단이 버튼처럼, 하나씩 오를 때마다 두 사람 또래였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얼마나 그 세계를 버텨낼 수 있을지, 언젠가 자신처럼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고 빠져나왔다 착각할지, 아니면 카자마처럼 굳건히 그 세계를 걸어 나갈지 문득 궁금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