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류지준기]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피로가 풀린다. 류지가 자주 말하고 실행에 옮기는 그 문장을, 준기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식이라면 당연히 사람 적고 조용한 곳일수록 용이한 것이 아닌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준기가 느끼는 것이라고는 피곤과 긴장뿐이었다.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말을 받아줘야 하고, 어디서 누가 덮쳐올지 모르니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모두가 진탕 취해 정신을 잃은 이 곳에서는 더더욱. 느슨함을 가장하고 숨어들었을 위협을 색출해내려 눈이 바쁘게 움직인다.

 

“술 맛 떨어지게 눈 그만 돌리고. 편히 마셔라, 좀.”

 

그런 준기를 모르지 않는 류지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론 준기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흥이 올라 호탕하게 웃고 있는 류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 이후. …그럼 술맛 안 떨어지게 나가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운을 띄웠으나 류지는 거의 비워지지 않은 준기의 잔에 술을 넘치게 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발 오빠는 쑥맥인가봐? 준기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여성이 테이블에 흐른 술을 능숙하게 훔쳐내며 말을 걸어왔다. 준기는 못 들은 척 한다. 이게 몇 번째더라. 계속 무시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향해 오는 대화가 불편했다. 충격요법으로 한번 확, 세게 놀아버리면 쑥맥 티 벗지 않겠어? 노골적인 말과 함께 붙어오는 몸은 더욱 불편하다. 준기의 얼굴이 티나게 굳어지는 것은 그녀의 말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게 된다. 나머지 사람들이 다 같이 웃으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준기는 더욱 마주 웃어줄 수 없다. 옷…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눈 둘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었으니. 눈도 말도 마주하기 꺼려진다. 입을 닫고 술잔에, 혹은 저 너머에 시선을 두는 게 최선이었다. 

 

다른 테이블 술상이 더 좋아 보이나? 류지가 다시 준기의 태도를 지적한다. 준기는 떠돌던 시선을 류지에게 고정시켰다. 아까보다 조금 더 날이 서있는 시선이었다. 메이드복을 입은 직원들이 접대하는 술집이라기에 웬일로 고상한 곳을 골랐다 했더니. 고상은 무슨. 어렴풋이 아는 것보다 훨씬 짧고 얇고 구멍난 옷도 메이드복으로 쳐주는 주점과 손님들의 관대함에 준기는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류지는 준기의 그런 불편해하는 태도마저도 즐겁게 곁들여 술잔을 기울였다. 저렇게나 마시고 나서도 멀쩡해 보이는 게 대단할 뿐이었다. 오빠, 안주는 더 안 필요해? 그러나 술 대신 분위기 혹은 사람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장삿속을 숨기지 않는 멘트에 착실히 대응해준다. 처음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화려한 술상이 다시 차려진다. 얼마든지 더 앉아 있을 수 있다며 행동으로 외치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준기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더는 여기 오래 버티고 앉아있을 생각이 없었다.

 

“바람 쐬고 있겠습니다.”

 

자신에게 몸도 모자라 입술을 붙이려 드는 여성의 행동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은지 오래였다. 천천히 나오시죠. 그러니 덧붙는 말에 담기는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끝까지 뻣뻣하게 구는 준기 탓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류지는 술자리를 파할 생각이 없었고, 준기를 딱히 멈춰 세우지도 않았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으나 그 뿐이었다. 자연스레 위스키 병목을 쥐고 잔에 가져다 댄다. 마치 준기의 존재는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듯 무감해보였다. 그런 류지가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마저도 거슬려서, 준기가 그 자리를 뜨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술집 문을 열었을 때엔 해가 지고 있었는데 나와 보니 밖은 이미 온통 어둠이었다. 준기는 술집 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가로등으로 가 몸을 기댔다. 지친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훨씬.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건 어떻게 해도 불편하다. 하아. 숨을 깊게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적을 형상화 한 것 같은 칠흑에 눈도 마음도 편해진다. 

 

날 서고 뒤엉켜있던 감정들이 하나둘 가라앉아 평정이 되돌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까는…왜 그랬지. 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굴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류지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둘러싸여 술 마시기를 즐기는 것도 하루이틀일이 아닌데. 처음에 떠밀리듯 입에 댔던 몇 모금으로 취해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대고 있던 꼴이 우스웠다.

 

“어이, 한.”

 

그런 준기를 잡아채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다시 주문하고 얼마나 지났다고? 의문은 금세 해결된다. 류지는 혼자 가게를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 옷차림으로 어떻게 밖에 나올 생각을 하는지, 아득한 기분마저 드는 메이드복의 여성 넷이 함께였다. 아까의 주문 값에 더해 그만큼의 팁을 더 얹어줬을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어제오늘 내내 일하고 번 돈이 꽤 된다고 해도, 한번에 탕진해버리는 것이 과연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준기가 이런저런 이유로 못마땅해 하든 말든 류지는 그녀들과 함께 좀 더 놀다올 예정인 것 같았다. 오토바이 주차해놓은 주차장 바로 앞 모텔에 방은 잡아뒀데이. 그리고…. 류지는 여성 한명에게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아, 먼저들 가 있으래이. 옆 골목 가라오케정도는 찾아갈 수 있다. 그러더니 그녀들을 먼저 보냈다. 저기에 뭐가 들었길래? 준기가 의문스러워하고 있는 사이 류지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손길을 따라 퍼지는 부스럭거리는 비닐소리가 꽤 시끄러웠다.

 

“이거. 들고 가서 입어보든가.”

“…이게 뭡니까.”

“앞으로도 자주 찾아달라고 그러면서 주던데. 내가 입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걸……제가 왜 입습니까?”

“뭐…메이드 카페에 숨어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준기는 그렇게 대꾸하려 했으나, 말은 반토막 나버린다. 류지가 메이드복이 담긴 투명한 비닐을 안겨주고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따라붙으려 하자 류지는 가라는 손짓을 한다. 어차피 따라와도 재미 없을기다. 임무는 재미로 하는 게 아닙니다. 가라오케에서도 축 처지는 얼굴로 앉아있으면 내 혼자 어딘가로 떠나버릴 텐데. 진권파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와. 못 할 것 같나? 

 

준기는 받아치는 것을 그만두고 입을 다문다. 술기운이 가득한 그에게 괜한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일이라. 이상한 기싸움의 끝은 그렇게 류지의 승리였다. 준기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류지 님. 다시 한 번 불러 세워보려 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벌써 열 걸음 정도는 멀어졌다. 정말 뭘 하든 자기 멋대로 구는 도련님 기질을 못 버리는 건가. 준기는 작게 혀를 찼다.

 

바스락. 손에 쥐어진 비닐이 자기주장을 해온다. 그러고보니 이건 놀리는 거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아니면 버리라는 말을 어렵게 꼬아서 하기라도 한 건가. 그나마 더 끌리는 선택지는 후자 쪽이라 준기는 근처에 버릴만한 곳이 있나 고개를 돌렸다. 아, 그거 버리지는 마라. 일단은 내거니까. 그러자 어떻게 알았는지 류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못 들었으면 몰라도 들어버린 이상 쓰레기통행은 불가능해졌다. 준기는 투명한 비닐 속에 남긴 메이드복을 와락 구겨잡고 류지와는 반대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

 

모텔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흘 이상 머물게 된다면 공원에서의 밤이 괴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욕조까지 딸린 큰 욕실을 보고 준기는 잠깐 갈등하다가 짧게 샤워만 하고 나오기로 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기도 했고, 류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내일 일찍 떠나겠다고 하더니.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걸 보니 어림도 없는 소리 같다. 무슨 일을 당했을 것 같지는 않고. 자신을 속이고 몰래 도망갔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그렇게나 즐거운가. 그 자리가. 류지와 준기의 감각은 너무 다른 축을 기준으로 돌고 있어서, 가늠조차 쉽지가 않았다. 

 

수건을 침대헤드에 걸어두고 샤워 가운을 어설프게 다시 여몄다. 잊기 전에 오늘 일을 먼저 정리해둘까. 류지가 없으니 잠깐이라면 이런 옷차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첩을 가지러 가는 길에 발에 채이는 것이 있다. 준기는 바닥에 팽개쳐져있는 메이드복을 본다. 아까 그 직원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것이겠지. 머릿속에 아까의 일이 순서대로 쭉 스쳐 지나간다. 다른 날의 주점과 다른 건 역시, 하나 뿐인 건가. 류지가 오늘따라 더 흥이 오른 것에 저 옷의 탓도 있나 싶던 생각은 이제 확신에 가까워졌다.

 

이 옷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역시 준기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비닐을 뜯어 꼼꼼히 살펴보지만 역시 모르겠다. 이게 옷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만 계속될 뿐이라. 다시 접어 비닐에 넣어둘까 하는 찰나 아까 류지의 말이 떠오른다. 들고가서 입어보든가. 정말 무슨 의미로 한 말일까. 아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텐데도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가 쉽지는 않다. 놀리는건가, 아니면 진심인건가. 둘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것마냥 고민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양 쪽이 번갈아가며 무게를 갖던 와중, 묘하게 서늘하던 시선 따위도 떠오르는 듯 싶다. …너는 마음에 안 드니 옷이라도 바꿔 입어보라는 뜻일 수도 있겠고. 꽤나 핀트가 엇나간 생각이었지만 아까 들어간 알콜 탓인지 생각의 방향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준기는 이리저리 골몰하다가 접었던 옷을 다시 펼친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위이고 아래인지 구분하기 어려울만큼 난해하고 복잡하게 생긴 천조각이었다. 입는다고 큰 손해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한번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거. 입을 수는…있는 건가? 익숙하지 않음에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이미 동해버린 관심은 망설일지언정 멈추지는 않는다.

 

‘메이드 카페에 숨어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나.’

 

이 말도 안 되는 짓의 명분마저도 류지의 말에서 찾아버리고. 준기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평소 입고 다니는 바람막이의 반 토막 길이밖에 되지 않는 것에 양 다리를 끼워 넣고 위로 올린다. 옷은 보기보다도 훨씬 짧았는지 허벅지의 반도 채 가리지 못했다. 그나마도 옷의 소재가 레이스를 닮아있어 너무 쉽게 팔랑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자칫 속옷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벗을까.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은 제대로 입어보고 벗자는 생각이 더 먼저 치고 들어왔다. 답지 않게 충동적이었다. 준기는 자신이 술에 약하다는 것을 제대로 기억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미 늦었지만.

 

끈으로 처리된 소매부분에 양 팔을 끼워 대충 옷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검은색의 치마 앞부분에 달린 작고 흰 천은 아마 앞치마를 의도하고 달아놓은 것 같았다. 기능은 생각하지 않은 건지 따로 떨어지지 않고 치마에 바느질 되어 있었다. 정말 보여지는 것만을 위한 복장이라는 것이 군데군데에서 드러났다. 준기는 옷을 마저 입기 위해 팔을 허리에서부터 위로, 그리고 어깨너머로 몇 번 보내 뒤의 지퍼까지 올렸다. 남자가 입기엔 가슴 부분이 조금 작았는지 교차되어 엮인 끈과 그 옆을 장식한 프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괜찮은 건가…? 혹시 옷이 상하지는 않을까 준기의 행동이 조금 느려진다. 무사히 머리에 레이스가 달린 검은 끈을 얹고 이어진 끈을 살짝 묶었다. 방금 씻고 나온 덕에 머리카락은 별다른 저항 없이 끈 아래로 눌렸다.

 

“이렇게 입으면…맞는 건가.”

 

고개를 내려 이리저리 옷을 둘러본다. 그리 크지 않은 움직임에도 살랑살랑 치마가 흔들린다. 정말, 옷보다는 장식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을 것 같은 직물이었다. 위아래 앞뒤 맞게 갖춰는 입은 것 같은데. 옷에 대한 매력도는 높아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눈으로 볼 때가 그럭저럭 볼만하다 싶은 정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착용감이 나쁜 탓이다. 남의 눈으로 보면 뭔가 별다른 게 있으려나. 준기는 제 모습을 비춰볼만한 거울을 찾아 욕실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객실의 현관문이 열렸다.

 

“…….”

“하, 으하하!”

 

못 봤을거라고 스스로 암시를 걸 시간조차 없었다. 찰나의 정적을 깨고 류지의 웃음소리가 치고 들어온다. 젠장. 준기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옷을 벗으려 들었다. 차라리 알몸인 것이 덜 부끄러울 것 같아서. 하지만 지퍼 슬라이더를 아무리 아래로 내려도 지퍼가 벌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와중에 고장이라도 난건가. 그사이 류지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준기의 앞에 서 있었다.

 

“와 그러나. 잘 어울리는데?”

 

방금 전까지 술을 마시다 온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선명하게 즐거움이 담겨있기도 했고. 준기는 자신을 훑어오는 시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예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고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그 몇 걸음에도 옷자락이 살랑거린다. 이 와중에 대체 악재가 몇이나 겹치는 건지. 환장할 노릇이라 치맛단을 잡아 내렸다. 류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저거, 자각 없이 저러는 게 더 안 좋다니까. 자신의 행동이 거부나 저항보다는 유혹에 더 가깝게 비치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한 준기에게, 류지는 작은 불만과 만족감이 동시에 들었다.

 

“이, 건. 그냥, 실수,”

 

실수로 입기엔 번잡스럽고 독특한 옷인데도. 그렇게 변명하는 게 어이없고 우스웠다. 류지는 준기의 말을 끊고 준기를 그대로 욕실로 밀어넣었다. 그래, 실수? 류지는 부러 그렇게 되물어주기까지 한다. 밀려들어간 욕실에는 어떻게 해도 아예 보지않기가 어려운 큰 거울이 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준기는 방금 전 자신이 떠들어댄 말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지 금세 깨닫고 만다.

 

“…예. 실수입니다. 그냥…어쩌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뭘 어쨌길래 그 옷을 실수로 입나?”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알아둬야 나도 자다가 실수로 안 입지 않겠나.”

 

류지의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가 욕실 타일들에 맞고 튕겨져나와 난반사된다. 덕분에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신나게 웃는 것처럼 들린다. 하. 준기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 느껴져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욕실의 주황색 등 덕분에 티가 나지는 않을테니 다행이라고 애써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벌어진 일, 그나마 좋은 점을 찾는게 자신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으니까. 물론 앞에 선 류지에게는 준기의 발간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였으므로 별 의미는 없었다.

 

준기는 다시 한 번 옷을 벗으려 들었다. 정말, 진심으로, 이 옷을 입고 류지의 앞에 서 있느니 차라리 알몸인게 훨씬 나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퍼 슬라이더는 여전히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준기는 차라리 망가트릴 작정으로 더 강하게 밀어 내렸다. 그러나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슬라이더도 멀쩡했다. 끙끙대는 그 모습을 보고 류지는 큭큭 웃고 있었다. 준기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한. 이런 접객용 옷은 말이다. 쉽게 벗겨지면 안 되니까…”

 

그만 웃으라고 말을 내뱉기 직전, 류지가 먼저 웃음을 거두고 손을 뻗어온다. 지긋이 눈을 맞추고 등 뒤로 올라오는 손길에 작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번엔 발을 뒤로 물려도 류지의 손이 버티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피하지 못하고 그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지퍼 손잡이를 완전히 위로 올려야, 내릴 수 있게 돼있거든.”

 

톡. 무언가 맞물리는 미미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조금씩 지퍼가 내려간다. 아. 차라리 알몸이 낫겠다는 거, 진짜 그럴까. 옷은 분명 점점 느슨해지는데 마주대한 시선은 점점 좁혀 들어오는 기분이라. 옷을 다시 동여매 저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옳은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다.

bottom of page